장기영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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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기영(1916년)은 일제강점기부터 언론인, 금융인, 체육인, 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은행 조사부장, 한국은행 부총재,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일보를 창립하여 언론 발전에 기여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 등을 맡아 체육계에도 기여했다. 196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으며,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남북 대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7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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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191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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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본명 | 장기영 (張基榮) |
출생 | 1916년 9월 15일 |
사망 | 1977년 4월 11일 (향년 60세) |
출생지 | 경기도 개성시 |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
경력 | |
경력 | 한국일보 사주 대한일보 사장 한국언론인협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 |
수상 |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
학력 | |
학력 | 개성상업학교 졸업 |
가족 | |
배우자 | 홍종옥 |
자녀 | 3남 2녀 |
기타 | |
기타 |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됨 |
2. 생애
2. 1. 생애 초반
호는 백상(百想)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의 곡물 무역상이었던 이동후(李東厚)이며, 어머니는 고성 이씨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이종묵(李鍾默) 슬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한남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에 농구 선수로 활약한 적도 있었으나 선린상고를 졸업한 3월에 조선은행에 입사, 금융계에 투신하였다.2. 2. 금융인 및 언론인 활동
해방 후 조선은행 조사부장이 되었고,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바뀌면서 1948년 다시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2년 만에 사임하고 조선일보의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울 환도 후의 어수선하던 조선일보를 재건하고 내분을 수습한 뒤 방일영에게 경영을 넘겼다.1953년 한ㆍ일 회담 대표의 대표단원의 한사람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최규하 등과 함께 일본측과 교섭하였다. 그 후 조선일보사 사장을 사임하고, 1953년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를 인수했다. 그리고 1954년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한국일보를 창립하였다. 이후 《일간스포츠》, 《서울경제신문》, 《소년한국일보》등의 자매지를 계속 창간하였고, 1957년 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방송으로도 진출하였다. 그밖에 국제신문협회(IPI) 한국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58년 한국 일간신문 발행인협회의 회장과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하여 발행인 겸 사장에 취임하였다. 동년 국제연합 세계연맹 제15차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왔으며, 1961년 국제신문협회(IPI) 한국위원회 초대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4년 8월 1일 기자 제1기 6명을 공채한 이후 정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해 다른 신문사에 이러한 관행을 퍼뜨렸다.[4]
2. 3. 체육인 활동
언론 활동 외에도 1961년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 및 아시아경기연맹 회장으로 활약하며 한국체육발전에 힘썼다. 196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된 것을 계기로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 등 스포츠의 국제교류에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특히, 1961년 최초로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 공산권과의 체육외교를 폈다.2. 4. 정치 활동
2. 4. 1. 5.16 군사정변 전후
61년 11월 한국일보가 필화사건에 걸린 일이 있었다. 민정이양과 관련하여 군정당국이 새 정당조직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이름이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이라는 1면 보도기사가 문제된 것이었다. 이 기사가 사실무근이라고 하여 사장 겸 편집국장이던 장기영과 편집부국장 홍유선(洪維善), 정치부장 김자환(金子煥), 정치부기자 한남희(韓南喜) 등 네 사람이 구속되었다.[3]이때 김용태는 이 필화사건을 무마하고 장기영을 석방하는 데 힘을 써 주었다. 그 후 민정선거를 앞둔 63년 2월, 장기영은 김용태의 천거로 박정희를 만나 그 자리에서 선거용 소맥(小麥) 도입을 위한 밀사로 지며오디어 일본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이 밀사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장기영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3]
2. 4. 2.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64년 5월 정일권 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되어 입각하였다. 경제부총리로 발탁되어 3년반 동안 산업의 근대화와 경제자립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외자도입정책 주도와 금리현실화, 유리창행정과 연탄의 흑백논쟁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면서 우리 나라 경제의 고도성장의 기틀을 잡았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방문과 1965년의 미국 방문, 그리고 1966년의 태국 등 아시아제국방문에도 수행, 경제외교에도 힘썼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하여 막후에서 일해왔으며,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회 회장과 아시아 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한 후, 1967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장이 되었다.2. 4. 3. 국회의원 및 남북 대화
1971년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제1지구당(중구ㆍ종로구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고,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이후락과 함께 남북 대화에 참여하여 남북 조절 위원회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한일 협력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공동위원장 대리를 겸임,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된 수차의 본 회담에 참석하였다.2. 5. 정인숙 스캔들 관련 의혹
1970년 3월 17일 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강변도로에서 발생한 정인숙 피살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중앙정보부에서는 언론통제에 들어갔지만, 장기영은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계를 비호하였다.[5] 이로 인해 장기영이 정일권 실각 공작을 벌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5]부총리 재직 당시 장기영은 경제 정책을 전담하다시피 했고, 정일권은 경제 문제에 관여하지 못했다.[5]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했고, 정일권이 경제 문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5]
정일권과 장기영은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서로 대립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장기영이 경제 문제에서 독주했지만, 정일권은 경제에 문외한이었고, 겸손한 성격 탓에 갈등은 없었다.[5]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었고, 결국 장기영은 정일권보다 3년 먼저 자리에서 물러났다.[5]
일각에서는 언론계에 복귀해 있던 장기영이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고 정인숙 사건을 이용하여 정일권을 공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
2. 6. 최후
1974년 국민체육심의위원이 되고, 1976년 민주 공화당 당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77년 대한체육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77년 1월 2일 가족들과 프라자호텔 중식당에서 신년 모임을 가졌다. 4월 11일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3. 상훈
1964년 체육공로상, 1967년 일등 수교훈장, 1969년 청조근정훈장,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0년 1급 문화훈장 최고 체육장 등을 수훈하였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가족 관계
배우자는 이문자(1920년 ~ 2004년 5월 22일)이다. 딸은 장일희(1943년 ~ )이다. 장남은 장강재(1945년 ~ 1993년 8월 2일)이고 며느리는 문희(1947년 7월 16일 ~ )이다. 손자로는 장중호(1973년 9월 22일 ~ )가 있고, 손녀로는 장서정이 있다. 차남은 장재구(1947년 ~ ), 3남은 장재민(1949년 ~ ), 4남은 장재국(1952년 ~ ), 5남은 장재근(1954년 ~ )이다.
6. 역대 선거 결과
장기영은 1960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117,145표(32.30%)를 얻어 2위로 낙선했다. 1971년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36,404표(43.47%)를 얻어 2위로 낙선했다. 1973년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종로구·중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57,607표(43.31%)를 얻어 1위로 당선되었다.
참조
[1]
뉴스
本社 張基榮社主 別世 / 어제아침
http://gonews.kinds.[...]
한국일보
1977-04-12
[2]
뉴스
故 張基榮社主 略歷
http://gonews.kinds.[...]
한국일보
1977-04-12
[3]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
[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5]
서적
비록 박정희 시대 (2)
중원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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